여러 사료를 종합하여 경력공의 생애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먼저 귀한 자료를 주신 염태호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만(李蔓)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무신. 자는 성여(盛汝). 아버지는 고려 밀직부사 억(억)이고, 어머니는 판삼사사 좌윤 안영부(安永孚)의 딸이다. 처부는 계림부원군 양경공 정희계(鄭熙啓)이다. 고려조에 무과에 급제, 홍로부사(紅爐副使), 인진사(引進士) 등을 지내시고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從二品), 사재감(司宰監)에 올랐다. 조선 건국 후, 봉렬대부로 호분위경력으로 별세하셨으며, 1408년에 표석(表石)을 세웠다. 묘표에 봉렬대부 호분위경력으로 등재된 것으로 보아 생전 벼슬은 봉렬대부에 이르렀으며, 사후 300여년이 지난 후에 작성된 족보 계보류의 우계이씨편에 판중(判中:판중추부사의 약칭)으로 기재된 것으로보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從一品)에 추증(追贈)되셨던 것으로 사려된다. 아들 인숙(仁淑)은 덕천군수 판사복시사(후에 사복시정으로 개정)를 역임하였으며, 지인천군사 증 정헌대부 오부(吳傅)의 따님이자 경주이씨 대제학 이성중의 외손녀인 해주오씨와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고, 따님은 여흥인 민무휼에게 출가하였다.
※. 판중추부사, 판돈령부사를 제외한 나머지 판사(판사복시사, 판예빈시사) 등은 모두 조선전기에 정3품 당하관급인 정(正: 사복시정, 예빈시정)으로 바뀌었음. 또한 각 주와 군의 지도자를 조선초기에는 지덕천군사, 지인천군사, 판한성부사 등으로 부르던 것을 후에 덕천군수, 인천군수 등 군수로 바꾸고, 판한성부사 등은 판윤, 유수 등으로 바꾸었음.
이은영: 님께서 엄청 수거하시는군여. ^6^ 전 수능준비땜에.. -[11/21-15:22]- 이은영: 그렇다면 부르는 칭호도 이제부턴 경력공이 아닌 판중공으로 바뀌어야될듯.. -[11/21-15:27]- 염태호: 이석 님의 노력으로 9세 이만 선조님이 행적이 먼저보다는 상당히 내용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에 느낀 것이지만 문중 인물에 대해서는 사돈댁 자료들이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석 님 수고 많았습니다. 저의 이러한 노력에 대해서 양경공 문중에서 저에게 무척 고마워하고 있답니다, -[11/26-01:16]-